대숲에 올라온 너의 이야기는 上: 봄볕 한 입 (2025)

XX대학교 대나무 숲.

작년 여름. 좋지 않은 길 끝에서 만난 그 애는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 학교 학생이라고 말했었는데, 연락처가 없으니 잘 지내는 지도 모르겠다.

그 애가 떠나고 난 후 기쁜 소식이 하나 늘어 전해줘야겠다고 늘 다짐했지만, 용기가 없던 내는 아직까지도 망설인다.

야, 나 수의대 갔다. 덕분에.

내는 이 말이 하고 싶어 여기까지 왔다. 그니까 고맙다고 말은 해야지 고마워. 너로 인해 만날 수 있던 우리 토리를 바라보니 꿈이 생겼고, 꿈이 생기다보니 그 현실이 마치 꿈이 꿈같았다.

근데 그 꿈보다 더 꿈같은게 생겼다.

잘 있어 잘 지내. 그 애의 마지막 인사에 가슴이 저릿한 걸 보니 이제야 알겠다.

내가 그 애랑 만난 자체가 꿈보다 더 슬픈 꿈이더라.

'바라는건 뭐든지 소중히 바라자.'

아직도 기억나는 그 애의 말을 들으면서도 어쩌면 넌 참 대단한 사람 같다고 느끼긴 했었는데, 내 느낌이 맞았다. 잠깐 왔다 갔는데 뭐 이리 여운이 길까 싶을 정도로 잔상이 길다.

바라는건 뭐든지 소중히 바라자는 너의 말을 곱씹으며 나는 아직도 이루어지지않는 소원을 소중히 바란다. 이젠 이 길의 끝에는 니가 없다. 토리도 여전히 니가 그리운가보다.

그래서 내가 니 좋아했다. 아주 많이.

추신.토리는 좀 컸다.

니는 잘 지내고 있나?

2012년 7월 어느 여름날 XX대 대나무 숲.

2012년 여름.

"얘들아, 너네 대숲에글 올라온거 봤어?"

너저분한 먼지 투성이 하나 없이 하늘이 높은 날씨다. 어떤 인사가 괜찮을까 수백번을 고민하면서 한 잔 두 잔 술을 꺾어마셨다. 오늘은 꼭 말해야 할텐데.. 그렇게 한창 술자리가 무르익던 자리에서 김원필의 한마디기 술자리의 흐름을 깼다.

대나무 숲. 줄여서 대숲. 마치 고등학생 때 페이스북에서 한창 유행했던 XX고 대신 전해드립니다. 에서 한 차례 레벨업 한 대학생들의 대신 전해드립니다와 같다. 그냥 우리 학교 사람이라면 전부 볼 수 있게 해놓은 커뮤니티였다. 물론 우리 학교 사람이 아니여도 충분히 사연을 쓰고 볼 수 있도록 모든 이야기를 숲지기가 관리한다.

김원필이 마시던 맥주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나를 제외한 술을 마시던 박성진과 강영현은 김원필에 말에 핸드폰을 켰다. 대학생활 4년차. 교내 로맨스랑은 이제 거리가 먼 나이.

"야야 대박. 미친. 개설렌다. 요새도 이런 글이 올라온다고? 어떡해.. 아직도 많이 그리운가봐.. 난 이래서 사랑을 믿고, 대숲을 믿어.."

벌써부터 눈에는 울먹울먹. F게이지가 상승한 김원필과,

"이게 뭐가 설레냐? 그냥 오글거린다. 김원필 닌 주접이 뭐 이렇게 심해? 무슨 여름이었다도 아니고, 연락처도 없는데 대숲에 글을 쓴다고? 말이 안되는데 글쓴이 주작 아님?"

질겁하는 표정으로 T게이지가 폭발한 강영현까지.

그리고 그 사이로 마. 그래도 글쓴 아는 진심일 수도 있지 않나. 새삼 낯선 박성진의 한 마디가 내 시선을 가로채갔다. 무슨 글인데? 김여주 넌 페북 좀 다시 깔라니까. 그제야 술잔을 내려놓은 나에게 대숲 글을 보여주던 강영현이다.

이미 댓글 수가 폭발한 것이 보인다. 주인공이 대체 누구냐며 추측하고 소란스러운 분위기에도 여전했던 나는, 강영현의 핸드폰을 돌려주지 않은 채 대숲에 올라온 글을 한참 동안이나 눈으로 꾹꾹 마음에 눌러담을 뿐이였다.

"야야! 그만 보고 게임하자! 게임!"

갑자기 판을 깨는 김원필까지. 지가 먼저 관심을 끌어놓고 말을 먼저 끊는 것 까지 아주 대단한 놈이다 저거. 우울한 분위기는 싫다고 말해놓곤, 무언가 번뜩이는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아님 지가 하고 싶은건지.

이 기세로 강영현의 말못겜을 걸고 술게임을 유도하던 원필이가 오늘은 아주 죽고 싶은 날인가보다.

"자 원필아. 이건 진짜 완전 짱 맛있는 고진감래주야."

"시발, 이거 강영현 니가 만들었지."

"어허! 말이 많다! 누가 술을 마셔! 김원필이 술을 마셔..~"

접이식 빨간 테이블에 네명의 대학생이 마름모 모양으로 각각 한 모서리씩 차지하고 둘러앉아 다같이 술을 마시고 있는듯 보였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한 명만 연달아 마시고 있는게 보인다.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 7층! 여덟개의 손이 순식간에 테이블 위로 모였고 맨 아래에 깔린 손은 원필이였으며, 벌주자 또한 원필이였다.

그렇게 다음 게임이 이어지고 다시 한번 게임 스타트! 아 신난다! 재미난다! 더 게임 오브 데스! 김원필 걸렸다. 마셔! 다음 게임도, 그 다음 게임도. 벌주자는 전부 김원필이였고, 그만큼의 벌주도 전부 김원필의 몫이였다.

이모 여기 한 병 더 주세요! 아이고 학생들 고만 좀 먹여! 그러다 애 죽어! 20년 넘게 한 장사 짬이 어디가겠냐고 술집 안에 있는 전방의 모든 시야를 주시하고 계셨던 주인 아주머니의 그만 먹이라는 걱정섞인 핀잔에도 괜찮다며, 우리 애는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랬다.

미친듯이 입에 술을 퍼부어대니 결국 눈에 맛탱이가 간 김원필이 테이블에 퍽 엎어졌다. 우리 테이블 바닥에 꼿꼿하게 서있는 술병은 한 눈에 봐도 족히 열 병은 넘어보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불과 1시간이 지난 시간이였다.

시발새끼들... 외마디 소리를 내뱉은 후 장렬히 전사하던 김원필이다. 야야 김원필 죽었다. 쟤 요즘 왜 이렇게 잘 죽는대? 몰라. 나이 들어서 그런가보지 뭐. 이제 술게임 고만하고 술이나 먹자. 원래 누구 하나 죽어야 술게임은 끝나는 거라고 알려주는 영현이다.

한 명 죽었으니 지금부터 말못겜 시작이라고 말하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온다. 일명 강영현이 지어낸 말못겜. 그동안 우리끼리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말하는 게임이다. 한 명이 술 먹다가 죽고 나면 우리끼리의 말하지 못했던 비밀 게임이 시작된다. 강영현이 '말할 수 없는 비밀' 이라는 일본 영화를 보고 온 뒤 감명을 받은 것이 화근이 됐다.

취한 사람은 취한 죄로 서로의 비밀을 못 듣는다는 규칙이 우리만의 법칙이였다. 영현이 납작한 테이블 위로 아슬아슬하게 놓여진 빈 소주병을 돌리기 시작했다. 운명이 걸린 소주병이 팽그르르 돌아가고 그 입구의 끝은 성진에게로 향했다.

"말해봅시다 박성진씨. 당신의 말할 수 없는 비밀은?"

"어."

턱 밑으로 마이크를 든 제스처를 하던 영현의 질문에 성진이 손을 들며 말했다.

"내 사실 니 전여친 좋아했다."

"미친놈 아니냐?"

대충 이런식이다. 오고가는 질문은 없고 답변만 있는 게임. 절대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신명나는 분위기가 무르익을수록 비밀은점차 흥미로워진다. 약간의 소란이 이어지고 다시 한번 병을 돌리자 이번에는 강영현 앞에서 멈춘 소주병.

"난 사실 니 전전여친 좋아했음."

"미친놈은 니 맞네."

"새삼스럽게."

우리는 농담 따먹기를 하며 과거 이야기를 들먹이고, 이를 웃음으로 승화시킨다. 서로 아는 것이 너무 많으니까 그저 다같이 있는게 즐거워서 웃는거다. 나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앞에 놓인 기본 안주인 매운 새우깡을 집어먹는다. 테이블에 놓여진 운명의 룰렛. 소주병이 빙그르르 돌아간다. 소주병의 입구가 내 쪽을 향해 멈췄다.

"어! 김여주 차례다!"

믈론 이 모든 것이 내 이야기일때는 전혀 흥미롭지 않다. 올게 왔다 싶었다. 강영현이 말했다. 생각해보니 요새 너 요즘 왜 이렇게 혼자 다니냐고. 무슨 일 있냐고, 니 얘기 못들은지 너무 오래 됐다며 그러게. 나를 재촉하던 둘. 덤덤하게 먹던 새우깡을 마저 삼키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아 이 이야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하나... 시발 나름 장엄하게 준비해왔는데 김원필이 앞에서 말을 다 잘라먹어서 말 할 타이밍을 놓쳤다. 에휴. 도움도 안 되는 놈아 잘자라.

나는 겨우 겨우 붙은 입을 떼어가며 한마디 했다.

"나 유학가."

강영현이 쉴 새 없이 돌려대던 아슬아슬하게 놓여진 빈 소주병을 삐끗 놓치며 와장창 깨뜨렸다.

대숲에 올라온 너의 이야기는 上

1부 초록빛 여름

부제 : 네가 나와 닮아가지 않길

"....뭐?"

"갑자기? 너 구라지? 언제? 어디로?"

"다음달.독일."

"와?"

"아빠가 가래."

나의 말에 다들 어안이 벙벙하다. 이유? 아빠 때문에. 그제야 아.. 너희 아버지 되게 엄하시지.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다며 수긍을 하기 시작했다.

"너 그럼 그동안 우리랑 안 다녔던 이유가 그거?"

"어."

"와 니 진짜 서운하다."

미안. 나의 외마디 사과와 함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던 술자리에는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굳이 요약하자면 요즘 신조어인 갑분싸. 그게 맞았다. 이 모든 것이 단기간에 일어난 일이 맞았기에 다들 놀라하는건 당연했다. 이제 졸업을 반 학기 남겨두고 대체 이제와서 왜?

그러고 보니 너 작년 여름방학 보내고 나서 애가 좀 이상해졌어. 우리가 같이 오션월드 가자고 했는데도 거절하고.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거야? 나의 빈 소주잔에 꼴꼴꼴 소주를 따르던 강영현이 질문했고, 나는 강영현이 따라 준 소주를 한 입에 털어놓으며 이야기했다.

"봉사했어."

무슨 봉사? 유기견 봉사. 니가? 니 동물 별로 안 좋아하잖아. 박성진이 얘기했고 나는 묵묵히 침묵으로 대답을 유지했다. 니네 부모님은 동물 애호가인디 니는 와.. 박성진이 다 하지 못한 말을 말 위에 얹었다. 끝나지 않는 핀잔에 결국 짜증을 섞어 답했다. 봉사시간 채우려고. 그니까 이제 그만 좀 물어봐.

"모야앙.. 너네 무슨 얘기해?"

"아 좀 술찌는 닥쳐봐라 원필아."

아 왜에-!! 뭔데!! 게임 다시 해!!! 약간 술이 깬 듯 일어나자마자 실컷 삐져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김원필 덕에 대화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아직 마무리 되지 않았던 강영현의 시선을 무시한 채 현실에 안주했다.

"너 무슨 일 있었지?"

"없었다니까."

"진짜로?"

"응. 진짜로."

게임 룰을 어겼다. 사실은 작년에 그 애를 만났어. 이 말만은 그저 꾹꾹 삼켜내며 굳이 내뱉지 않았다. 여전히 내 눈빛을 살피던 강영현이 이윽고 나에게 술잔을 기울였고, 나는 묵묵히 술잔을 받아들이며 그 날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다 식은 소주가 나의 식도를 타고 넘어간다. 쌉싸릅한 맛은 그 날의 기억과도 같았다. 나는 아직도 너에게 취해있는걸까. 나의 미련은 내일 내가 겪어야 할 숙취처럼 여전히 오래도 남아있다.

턱 끝 까지 조여맨 밀짚모자, 멜빵바지와 새하얀 장갑, 털레털레 귀찮은 마음을 마스크로 대충 무장하며 봉사장으로 향했던 그 기억에는 철이 없던 내가 있었고, 그 계절에도 여전히 네가 있다.

윤도운.

내가 감히 너를 기억하겠다고 말해도 될까.

끝장을 보자고 까불대던 김원필이 도리어 끝장이 났다. 그렇게 박성진 등에 업혀서 헤롱대는 김원필로 인해 술자리가 끝이 났다. 노네 두궈바아.. 김원필의 마지막 유언이였다.

병신이 그니까 왜 까불어. 혀를 차며 먼저 나간 둘을 바라보다 따라 나갈 채비를 했다. 이들과 집 방향이 다르던 나는 반대쪽 길을 걸었다. 가는 길이 나와 달랐던 강영현은 나를 따라왔다.

"너 왜 여기로 가?"

"너 술 많이 마셨잖아."

갑자기? 그렇게 굳이 나를 집에 데려다 준다는 강영현의 팔에 붙잡혀 집으로 가는 길이다. 10년을 가까이서 봤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 가던 말던 신경도 안 쓰던 애가 안 어울리던 호의를 베푸니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얘가 왜 이래? 싶은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강영현과 가로등 불빛이 화사한 골목길을 걸었다.

마냥 사는게 익숙해서 그냥 저냥 살다보니 몰랐는데 이제보니 서울은 참 살기 좋은 도시같다. 그 때는 이런 길도 없었는데. 대숲을 읽고 난 후 작년 여름 생각에 푸흡 하고 웃음부터 났다. 그 때 길도 잃어버려서 곤욕도 치뤘었지. 맞지. 맞지. 이러한 내 모습을 연신 지켜보던 강영현이 질문했다.

"너 왜 그래?"

"뭐가."

"정신 나간 애 같어. 가끔 보면."

"내가 뭘."

작년 여름방학 지나고 나서부터 너 많이 이상해진거 알아? 강영현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는 질문에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김여주. 아까 올라 온 대숲 글 있잖아."

"엉."

"그거 설마 너 아니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니가 맛탱이 간 시기랑 비슷해서."

강영현은 여전히 눈치가 빨랐다. 순간 식은 땀이 나기 시작했다. 야 인마. 아무리 그래도 저게 나겠냐고. 말도 안되는 이야기 좀 하지 말라고. 나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냥 단순히 집 안에서 일이 좀 있었는데 유학 준비로 바빴다는 거짓말로 상황을 무마했다.

"유학은 꼭 가야되는거야?"

"가야지."

"왜?"

"공부하러 가는데 그거까지 말해줘야돼?"

단칼에 못을 박던 나의 말. 처음으로 씁쓸한 표정을 내비치던 강영현이 말했다.

"섭섭해서 그러지."

10년을 봤잖아. 친구끼리 그런 말도 못 하냐. 라는 강영현의 말을 애써 무시하기 시작했다. 나는 정 떼는 법을 이런식으로 했다. 이제야 하고 싶은 일이 생겼던 나라서.어쩌면 해야 할 일이 생긴 나였기에 가장 가까운 너에게는 하지 못하는 말이였다.

"영현아."

"왜."

"바라는건 뭐든지 소중히 바라자."

"뭔 소리래. 갑자기."

대화의 물꼬를 틀고 걷다 보면 어느새 집 앞이다. 또 알 수 없는 말만 반복한다며. 너 진짜 어디 아픈거 아니냐고. 병원 한 번 가봐야 하는거 아니냐며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너에게 스스럼없이. 그냥. 나는 이 말이 좋아서. 그렇게 집으로 들어가기 직전이 되서야 말할 수 있었다.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영현에게 나즈막히 대답했다. 강영현은 내 말을 듣자마자 기가 찬 듯 웃어보이며 내일 수업이나 잘 나오라고 말한 뒤에 제 갈 길을 갔다.

작년 여름방학이었다.

죄책감 하나로 시작했던 유기견 봉사활동이였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나는 동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우리 부모님은 동물 애호가로 유명했던 분들이였다는 이질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 내면과 이면의 접목점이 들키지 않았을 뿐이다. 처음에는 작은 동물병원을 운영하시던 아빠가 상자에 버려진 강아지 한마리를 데리고 온 할머니의 사정이 안쓰러워 무료로 치료를 해준 영상이 큰 화제가 됐다.

요즘같이 삭막하고 살기 힘든 시대에 저런 수의사가 어디있냐고. 동물을 살리는 시민영웅. 수 많은 사람들의 찬사를 받던 아빠는 여러 동물단체에서 후원을 받기 일쑤였고, 아빠의 병원은 점차 날이 갈 수록 성장해나갔다. 부모님의 늦은 출세.

엄마는 말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 애기였을 때. 한 평생 단칸방에 셋이서 겨우 끌어안고 살았던게 우리 가족이라고. 그 이후 차츰차츰 나아지는 형편에 처음에는 고급빌라, 그 다음에는 고급 아파트, 그 다음에는 가정부도 고용하며 앞에 마당이 있는 고급스러운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갔다. 그게 지금의 우리 집이였다.

솔직히 말해서 좋았던 것 같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처음에는 그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더할나위 없이 좋았던 것 같았다. 또한여주 너만큼은 그 가난이 기억이 안나는 것이 다행이라고 부모님은 말했다. 오히려 호화로운 생활은 부담이 되어가던 찰나, 날이 갈 수록 성장해나갔던건 아빠의 병원 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집이 바뀌는 동안 엄마와 아빠의 마음도 바뀐다는 걸 나는 몰랐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사람은 위치의 높낮이에 따라 마음도, 인간적인 결도 변한다. 우리 부모님이 그랬다. 그래서 나는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아직까지 믿지 않는다.

특히 유난히 나를 잘 따르던 강아지가 하나 있었는데, 그 녀석만큼은 이상하게 정이 갔다. 그래서 정을 떼려고 많이 노력했다. 생긴게 도토리를 닮아서 그런가. 엉덩이 부분에 도 도토리 같이 생긴 점이 하나 있었다.

그렇게 많고 많은 수십마리의 강아지 중에서 나는 유독 그 녀석만 눈에 담아냈으면서도, 딱히 이름은 지어주지 않았다. 어차피 떠나 보내야 할 걸 알기 때문에.

나만 보면 쫄랑쫄랑 꼬리를 흔들던 녀석이였다. 딱히 예쁘게 생긴 강아지는 아니였지만 그냥 어딘가 마음에 이끌리듯 눈길이 갔을 뿐이다. 나를 잘 따르니까 흠칫흠칫 예뻐보였을 수도 있고. 하지만 나의 예상처럼 이 평화는 얼마 가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가 야심한 밤에 방송에서 데려온 유기견들을 남들 몰래 유기하는 것을 보기 전 까지는 동물도 가족이라는 말을 믿었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부모님의 유기하는 행동. 보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곁을 내주려고 하지 않았고, 나는 이를 외면했다. 강제로 부모님에게 유기되는 유기견 중에서 그 녀석도 있었다. 기약이 있던 이별이였다.

아직 이름 한번 못 지어줬는데..... 처음으로 미안했다. 고작 그게 전부였다. 나는 아직 힘이 없으니 이름을 지어줄 수가 없었다는 이유를 핑계 삼아 나의 못난 마음을 달래기로 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름 없는 유기견으로 떠나보내서 다행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새 주인을 만나 금새 새 이름을 갖게 될 녀석에게 굳이 헌 이름은 필요없었다. 얘야. 낡은 것은 두고 가렴. 아픔도. 슬픔도. 이별도. 그 녀석을 위해 몰래 기도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유기견들의 분양이 쉽게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만큼 나는 무지했다.

"여주야. 세상은 돈이 전부야. 돈을 많이 벌어야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어."

인간은 결국 돈 앞에서 무릎 꿇는 동물일까? 순박하고 물욕이 없던 엄마와 아빠는 결국 사회로부터 받는 우호적인 관심과 재력에 탐욕이 생기셨는지, 유기견들을 데려와 키우시던 관심으로 사랑을 받았다. 더군다나 죄책감 없이 유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시던 부모님의 모습은 한 편으로 잔인하게 느껴졌다.

우리 부모님은 사랑을 먹고 자란 괴물 그 자체였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무거운 감정은 죄책감이라는 것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필히 내가 그랬다. 이로 인해 여름방학이 되었음과 동시에 유기견 봉사활동 신청서에 내 이름을 적어냈던 마음에는 선함이 설려있지 않았다. 그저 죄책감이 전부였다. 오직 나의 목적은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 그랬으니까. 이렇게라도 해야 사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

그렇게 강원도. 무슨 정신인지도 모를만큼 넋 놓고 신청했던 대학생 모집 여름방학 유기견 봉사 및 힐링캠프는 결국 신청이 되었고, 무려 한 달짜리 유기견 봉사 및 힐링캠프가 시작됐다.

벌써부터 풍겨오는 강아지들의 배변냄새, 근처에 하나 없는 편의점, 여기저기 관리가 안된 털, 둥둥 떠다니는 미세먼지, 병균이 잔뜩 섞인 개털과 함께 불어오는 더운 바람. 이를 내리쬐는 뜨거운 햇볕까지.

시끄럽게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에 당장이라도 귀가 찢어질 듯 하다. 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날은 정말 최악이였다. 내가 미쳤지. 강영현이 오션월드 놀러가자고 할 때 거기나 같이 갈 걸 그랬어. 인스타 스토리를 뒤적여보니 강영현은 벌써 박성진과 김원필은 오션월드로 놀러간 듯 싶었다. 영현아 나 여기 있는데 지금이라도 나 데려가줘. 제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다 못해 흘러내리는 땀. 아 더이상은 못 참아. 하기 싫은 마음과 귀찮음에 툭툭. 길가에 널부러진 돌맹이만 발로 차고 있다. 죄책감 하나로 여기까지 온 것이 큰 잘못이 되었다. 나 같이 준비도 안된 애가 봉사를 오는게 아니였는데, 친구도 없고 지금 이게 뭐하는건지.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강아지 배변을 치우고 있을때 쯤, 내 맘대로 자리를 이탈했다.

"아.....심심하다."

큰 나무에 기대어 앉아 그늘 아래에서 땀을 식혔다. 휴대용 전동 선풍기를 챙겨오기를 잘했다. 하지만 탈탈 거리는 전동 선풍기는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는지 유난히 힘이 없다. 봉사가 끝나려면 아직 두시간이나 남았다. 남은 시간동안 뭘 해야하지 싶어 무작정 핸드폰을 켰다.

'뭐해? 나 빼고 재미있어?'

지금쯤 파도풀에서 잠수 중일 것이 분명한 강영현에게 디엠을 보냈다. 재밌냐고 재밌냐고 재밌냐고오 불이 붙은 디엠을 연달아 타이핑을 쳐내며 보내던 중, 내 앞에서 참나무의 그늘이 아닌 누군가의 그늘이 졌다.

"야."

땡볕 아래에 있으면서도 주근깨 하나 없이 엄청 뽀얗게 피어난 얼굴, 챙이 넓은 모자, 어딘가 얼룩진 민소매 티, 늘어난 배기바지와 농사꾼들이 신는 무릎까지 오는 장화.

이게 그 애의 첫 모습이였다.

"나?"

"어. 니."

"....뭔데 반말이야?"

"니 그딴식으로 할거면 걍 집에 가라."

"....뭐?"

"귓구멍 막혔나. 그럴거믄 집에 가라고."

야. 너 뭔데 시비야? 초면에 반말부터 하는 그 애의 첫인상은 자고로 정말 최악이였다. 그 애를 쏘아보는 눈초리로 올려다보며 말에 가시를 섞고 말했다. 그건 니 알 거 없고. 지금 일 안하고 뭐하나? 놀러왔나? 다짜고짜 시비를 거는 그 애한테 화가났다.

"니 대학생이제?"

"맞는데?"

대학생이냐는 질문에 퉁명스러운 말투로 맞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애는 한 쪽 입꼬리가 픽 올라간 상태로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약이 바짝 올랐는지 눈도 바짝 뜨고 상기 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낸 니처럼 시간 떼우러 온 대학생 아새끼들 보면 화가난다. 동물도 생명이다. 니는 생명이 우습나. 이 일이 하찮아보이나."

"야. 너 초면에 지금..."

"시간 맞춰서 챙겨줄테니까 걍 끄지라."

니 같은 봉사자는 필요없다. 그 애는 나보다 훨씬 더 도가 지나치게 야박했고, 쯧! 소리를 한번 내뱉으며 다시 자기 갈 길을 갔다. 뭐.. 뭐 저런 애가 다 있어?! 열이 잔뜩 받은 만큼 더위가 한번에 몰아쳤다. 탈탈거리며 떨려오던 휴대용 선풍기는 작동을 멈춘지 오래다.

"이건 또 왜 이러는데!!!"

배터리만 갈아 끼워넣으면 될 것을 신경질나게 던져버렸다. 내 손에 의해서 박살난 선풍기는 제 모습을 잃어버린채 잔혹하게 분해되었다.

아직도 나는 이 날의 온도를 기억한다. 짜증스럽게 습하고 더운 날씨. 운수 좋은 날이 대체 어디있냐며 혼자 씩씩대던 나. 그만큼 되는 일이 하나도 없던 날. 나의 기억 안에서 자꾸만 회자되는 숲. 풍경은 지나치게 눈부신 초록빛. 그만큼 겉잡을 수 없이 뜨거웠던 나의 여름.매미들이 참나무에 매달려 슬피 울 적에 너를 만났다.

"여러분 오늘 하루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저녁시간. 사람들을 한 데 모아놓고 오늘 하루 고생했다는 연설을 마치는 관계자들의 인삿말이 오고가며 훈훈하게 마무리가 되어가는 듯 했다. 저건 뭐야? 자세히 보니 관계자들 사이에 끼어있는 허름한 차림의 그 애도 보였다.

뭐야? 쟤도 관계자였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확성기를 든 그 애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서로의 얼굴을 보자마자 동시에 우리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겠지. 곧 이어 이어질 그 애의 멘트도 거슬렸고, 그냥 사람 자체가 되바라먹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탓일까. 모든 것이 너무 마음에 안들었다.

"우리 모두 유기견들의 아픔을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달랑 봉사시간 채우러 온다는 마음보다는 이 애기들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보듬어주자는 취지에서 많은 것을 느끼셨으면 좋겠고요. 또.."

저 애의 멘트에 신경이 긁혔다. 어딘가 모르게 나를 겨냥하며 말하는 것 같은 멘트가 점점 길어진다. 저게 진짜. 지금 나랑 해보자는건가? 짜증 게이지는 점점 더 상승한다.

여기저기 박수 갈채가 쏟아지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괜시리 욕 먹을까 두려워 소리 없는 박수를 쳤다. 언제 끝나? 말 진짜 많다 쟤. 나의 진짜 속마음은 이러했다.

"저녁식사는 바비큐로 준비해놨습니다! 우리 한 달동안 잘 지내봐요!"

바비큐라는 멘트로 마무리 되는 소리에 마른 침을 꿀떡 삼키며 쌓아둔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진 나였다. 나는 이만큼이나 단순했다. 하루가 고되다.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숙소에 들어와 짐을 풀었다. 괜시리 욕을 먹은게 기억이 나 약간은 울컥한 마음으로 미리 가져온 파스를 팍팍 뜯었다.

쟤는 왜 나한테만 그래? 농땡이 피우는 사람들 분명 나 말고도 많았을텐데. 날씨가 더운 걸 어쩌라고? 아이고 두야.. 벌써부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문득 핸드폰을 켜보니 언제 이렇게 전화를 해댔는지 부재중 전화가 7통이나 넘게 찍혀있었다. 발신자는 모두 강영현. 방금까지도 내게 전화를 건 걸 보면 얘도 수영장에서 다 놀고 나와 전화를 한 듯 싶었다. 아쉬움 하나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은 얼마 안가 강영현이 전화를 받았고, 나는 세면도구를 챙기며 통화를 이어갔다.

"여보세요?"

"어. 전화했었네?"

"너 어디야?"

"여기? 강원도. 너넨 잘 놀았냐?"

"잘 놀았지. 여주 너 강원도 어디야? 우리도 아직 홍천이야. 이제 막 나와서 강원도 안 벗어났는데 차 돌릴까?"

"어? 어.... 아냐 아냐 됐어."

조심히 들어가. 내가 또 연락할게. 툭 끊긴 전화.일부러 더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이왕 마음 먹은거 끝까지는 해 봐야지. 여기까지 왔는데..... 저 남자애 때문에 당장이라도 데리러 와달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였다.

에휴 씻고 밥이나 먹으러 가야지... 읏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와보니 사람들이 화장실 앞에서 줄을 서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눈에 봐도 쾌적하지 못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던 나를 탓해야만 했다. 여기는 강원도 어느 시골이니 서울에 있을 법한 욕실을 당연히 찾을 수 없었다.

더운 물 하나 없이 솥에 끓여대던 물, 다 낡은 바가지, 얼마나 썩었는지 잘 닫히지도 않아 겨우 고정시켜야만 하는 나무 문짝, 바닥에 두서없이 기어다니는 풀벌레. 욕조 하나 없이 큰 대야에서 몸을 씻어야 하는 상황.

위생도 더불어 환경은 진짜 최악이였다고 생각했다. 난 저런 곳에서 절대 못 씻어. 이게 나의 결론이였다. 가난을 망각한 채로 살아왔던 그 당시에 나는 철이 없는 나머지 다짜고짜 지도앱을 키고 목욕탕을 검색했다. 아무리 이런 시골이여도 결국 사람 사는 동넨데 어디 목욕탕이 한 군데는 있겠지. 지도앱을 마구 헤집었다.

다행스럽다고 해야하나. 검색했던 GPS에는 목욕탕이 한 군데가 있다는 좌표와 함께 빨간 점이 떴다. 시골에서 살아본 적이 없는 나는 시간이 아직 저녁 다섯시인걸 보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부랴부랴 세면도구를 들고, 사람들을 피해 무턱대고 목욕탕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시발........ 좆됐다....."

한 참을 걸었다. 얼마 남지 않은 배터리를 감당하지 못한 핸드폰은 이미 한 시간쯤 전부터 전원이 나갔다. 채감상 두시간은 된 듯 했다. 나는 아무리 여름이여도 시골은 서울보다 해가 빨리 저문다는 예상도 차마 못하고 그대로 길을 잃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씻는 걸 포기하고자 했던 나는 되돌아 온 길을 다시 걷기로 했지만, 어딜가나 똑같은 길과 풍경에 해가 저물어가는 모습만 바라봐야했다.

정해진 범위내에서 생활을 했었어야 했는데, 무리에서 이탈한 벌을 받는 것일까? 아님 정말 봉사하려는 마음을 잊고 내 뜻대로 행동했던 못된 마음에 대한 대가였을까? 한 참을 걸어대니 발은 이미 퉁퉁 붓고, 고갈된 체력은 한계가 왔다. 속상한 마음에 눈물밖에 안 나오는 상황에서 갈피를 못 잡을 때 쯔음, 저 멀리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내 눈 앞에는 유기견 한마리가 다가왔다. 어디서 많이 본 강아지인 것 같았다. 낯선 강아지는 느닷없이 나에게로 와서 내 발 밑에 누워 나에게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어딘가 모르게 그리운 마음이 들었다.

"너 주인 없어?"

대화가 통할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녀석은 내 말을 알아듣는듯 꼬리를 흔들며 나를 지키려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꼬리를 흔드는 이 녀석의 엉덩이에서 도토리처럼 생긴 점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야.. 너.. 혹시.. 이제야 알아 볼 수 있었다. 부모님이 유기하기 전, 떠나보내기 전부터 이상하리만큼 정이 가던 그 녀석이였다. 어떻게 여기서 다 만났냐고. 미안한만큼 반가웠고, 반가운만큼 괴로웠다.

마음의 마찰이 부딪혀 괴로웠던 것도 잠시, 애교를 부리던 이 녀석은 갑자기 낑낑대더니 아까 나왔던 수풀 쪽으로 나에게 따라오라는 듯한 시늉을 했다. 이 녀석의 뜻 대로 나는 수풀 쪽으로 향했고, 이 안에는 태어난 새끼 강아지 한마리가 눈도 못 뜬채로 낑낑대고 있었다.

"야.. 너.."

나에게 새끼를 보여준 이 녀석은 오히려 안심을 했는지 내 앞에서 갑자기 픽 하고 쓰러졌다. 야 너 왜 그래? 아무리 흔들어봐도 일어나지 않은 그 강아지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제발. 일어나봐. 죽지마. 죽지마 일어나봐..

이제야 깨달았다. 이미 우리 집에서 유기를 당할 때 부터, 아님 어쩌면 그 안에서 너는 이미 새끼를 배고 있었구나. 처음 보는 낯선 광경에 측은지심이 들었고, 지우고 싶어 찾아왔던 이 곳에서 오히려 죄책감이 더 늘어만갔다. 유기견들이 오히려 더 쉽게 쉽게 분양될 수 있는거 아니였냐고.

몰랐던 현실에 속은 것을 자책하며 그저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만 했다. 마지막까지 너를 외면했던 것도 나였는데, 마지막까지 나에게 찾아와 자신의 새끼를 보여주고 나를 반겨주던 것도 너였구나. 미안해. 미안해.

"야!"

그 때였다. 어디서 손전등이 비춰졌고, 나를 찾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 와 이리 멀리 나왔노? 한 참 찾았다이가."

아- 억수로 덥다. 정말로 한 참을 헤맨 듯 짜증섞인 말투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던 그 애 였다. 어떻게 알았냐는 나의 말에 인원수 체크를 하던 도중 내 이름을 불렀는데 내가 대답이 없자 나를 찾으러 나왔다고 한다.

그니까 내가 니보고 집 가라고 했나 안했나. 꼬라지를 보아하니 또 니 혼자 싸댕기다 길 잃었나보네. 혀를 차던 그 애는 나를 한 눈에 파악했다. 주저앉아 있던 나는 그 애의 바지를 붙잡고 말했다.

"도와줘......"

"....뭐?"

내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들려오는 새끼 강아지가 낑낑대는 소리에 후다닥 달려와, 어깨에 둘러맨 수건으로 아기의 몸을 닦던 그 애였다.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나는 쓸쓸히 죽어가는 이름도 모르는 강아지를 안아주지도 못한 채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였다.

"다 울었나."

"안 울었거든."

이 애와 함께 수풀 사이에 무덤을 만들었다. 유기견의 죽음을 처음으로 목격한 나와 달리 능숙하게 죽은 어미 강아지를 묻어줄 수 있던 최선의 방법이라고 했다. 그렇게 무덤을 만들어준 후 본인의 품 속에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를 안으며 숙소로 돌아가던 길이였다. 침묵을 유지하며 걷던 도중 그 애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니 봉사 처음이제?"

"응."

"차라리 봉사 할라믄 다른걸 하제. 뭣 한다고 서울에서 여까지 기어오나. 불편한게 을매나 많은데. 특히 니 같은 서울 깍쟁이들은 다 하루 이틀하다 질겁하고 도망치드마."

그 애가 말했다. 동물 돌보는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특히나 한번 버려진 상처가 있는 애들을 다시 한번 케어하는게 그리 쉬운 줄 아냐고. 나 동물 좋아해요- 강아지 좋아해요- 하면서 만만하게 봤다가 결국 그만큼 도망치기 쉬운 봉사가 유기견 봉사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예쁜 강아지들만 봤으니까 그렇다고 한다. 막상 관리를 받지 못하고 병이 들거나 지저분한 모습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부 외면하기 마련이라고. 그래서 난.

"저기 미안한데.. 난 동물을 애초에 좋아하지 않아."

"뭔 소리고."

"죄책감 때문에."

대답했다.

"죄책감 때문에 온거야. 미안해서."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 애에게서 갸우뚱한 표정을 이끌어냈다. 동물을 사랑하는 너에게 동물들에게 차마 못할 짓을 했다고 차마 말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일부러 주어를 빼고 말했다. 니 말마따나 여긴 진짜 내가 있을 곳이 아닌가보다. 미안해. 내일이라도 바로 올라갈게. 라고 말하니 그제야 그 애가 대답했다.

"아이다."

"뭐가."

"있어도 된다 닌. 그럴 자격 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는 나의 말에 너는 대답했다. 딱 보면 안다. 다시 봤다 니. 한 품에는 여전히 낑낑대는 강아지 세마리를 안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니 밥 안뭇제? 이거라도 무라. 내 이름은 윤도운이다. 날씨 탓에 녹은 것이 분명한 다 뭉개진 초코파이 하나를 건네주던 윤도운. 아이코, 다 녹았노. 당황하며 어쩔 줄 모르던 그 애의 초코파이를 고맙다며 받아들였다.

"내 이름은 윤도운이다. 나이는 니랑 같다. 잠깐보고 나쁘게 봐서 미안."

"난 김여주야."

"아까 차트 봐서 안다."

대학교에 가고 싶었으나 사정이 안되서 유기견 봉사를 하며 버려진 아이들의 새로운 주인이 되어 할머니와 살고 있는 순박한 시골 청년이라고 했다.

"점마들이 뭔 잘못이 있다고.."

인간들은 대체 왜 그럴까. 힘이 없는 동물들에게 힘이 되어주지는 못할 망정 귀찮아지면 왜 자꾸 버릴까. 책임지지 못할거면 키우지를 말아야 하는데. 그러게. 이 한 마디로 모든 걸 무마하고자 했다. 너의 말에 나도 동감했다. 하지만 동감하면 동감할 수록 부끄러움을 느꼈다.

"미안해."

"뭐가?"

"그냥 다..."

죽어가는 강아지들에게 죄를 지었다. 비로소 너에게 할 수 없던 말을 자꾸만 곱씹는다.

"미안하면."

"어?"

"임마 이름이나 쫌 지어줘라."

갓 태어나 눈도 못뜨고 낑낑대는 새끼 강아지. 벌써부터 어미를 잃고 낯선이의 손길에 닿아 커갈 것이 분명했던 너의 운명. 하지만 이 애라면 너를 분명히 버리지 않겠지. 머지않아 헤어지지 않아도 될 너에게 이름이 필요할거야.

"토리.."

"토리?"

"응. 얘 엄마 강아지 봤어? 엉덩이에 도토리 같은 점이 하나 있거든."

어쩌면 내가 지어주고 싶었는데 지어주지 못할 이름이였던 것 같아. 말을 아꼈다. 멍하니 토리를 바라보던 윤도운이 대답했다.

"이름 잘 짓네."

다짜고짜 눈물이 났다. 미안해. 진작 지어줬어야 했는데. 네가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가능한 조용하게 눈물을 터뜨렸다. 하염없이 떠들다보니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도착했다. 하도 늦게 도착했던 탓에 바베큐고 뭐고 끝난지 오래된 듯 보였다.

시골은 도시에서만 한 평생을 살던 나에게는 이렇게나 낯설고 무서운 도시였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도 걸었던 길의 습도가 내게는 자욱하게 남아있다. 그만큼 오늘은 꽤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아까는 도무지 씻을 엄두가 나지 않던 화장실로 들어가 세안을 마쳤다. 여전히 쾌적한 환경은 아니였지만, 물이 나오고 씻을 곳이 있다는 것은 꽤나 감사한 일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안을 하는 내내 눈물도 함께 씻어내려갔다. 눈 앞에서 죽어가는 강아지의 죽음을 막지 못한 트라우마는 여전히 생생했고 그만큼 여파가 컸다. 그렇게 씻고 나오니 나를 기다린 듯한 윤도운이 바나나우유 두개를 들고 화장실 앞에 서 있었다.

"산책갈래?"

그 애가 말했다. 갑자기? 여기에서는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별이 많다. 니 어차피 지금 안 잘거잖아. 따라온나. 한 손으로는 바나나 우유를 쥐어주고 남은 한 손으로는 나의 손을 잡았다. 나는 그렇게 그 애에게 이끌려 밤하늘 아래로 걸어갈 뿐이다.

"윤도운... 어디까지 가는데..."

헉헉대며 윤도운의 손을 잡고 한 참을 걸었다. 윤도운의 안내에 따라 가벼운 산중턱을 올라가니 밤 하늘의 별이 당장이라도 쏟아질듯 별이 눈부시다. 니 말이 맞네. 서울에서는 이런거 구경 하나 못하는데.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이라고 무시했었는데 다른 빛이 깃들여져 있었다. 예쁘다... 무심코 내뱉은 말에 윤도운이 대답했다.

"장관이제?"

"응. 그러네."

"여주야."

"어?"

"니가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

"여기서는 다 털어놓고 갔으면 좋겠다."

"뭔 소리야..?"

"처음이였거든."

죽어가는 강아지를 봐도 본체만체 하던 사람들. 봉사하러 왔다는 마음으로 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시간만 떼우러 왔던 대학생들.

"닌 다르다."

윤도운의 눈이 반짝였다. 이 세상에 동물 때문에 우는 사람들 중에 나쁜 사람은 없다고 그 애가 말해주었다. 어쩌면 가장 이질적인 삶을 사는 것이 나일텐데. 너는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나의 삶을 정의하며 위로했다.

"도운아."

"응."

"넌 꿈이 뭐야?"

"수의대 가는거."

닌? 난 이렇게 안 사는거. 윤도운의 말을 듣고 대답했다. 이렇게 안 사는게 뭔데? 라는 말에 정답을 일컫어 줄 수 없었다. 아직 나도 정답을 몰라. 그래서 말해줄 수 없었다.

"도운아."

"와."

"바라는게 있으면 소중히 바라자."

그니까 넌 수의대에 갈 수 있을거야. 고마워 나한테 그렇게 말해줘서. 나보다 훨씬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너에게 유일하게 해줄 수 있던 말이였다. 그만큼 네가 부디 나와 닮아가지 않기를.

나의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내려놓아도 될까? 이 질문하지 않았지만 너에게 Yes라는 확답을 받았다. 내가 남겨둔 모든 죄를 용서받은 기분이였다. 어쩌면 나는 이 날부터 윤도운 너로 인해 내 삶을 구원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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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Mrs. Angelic Lark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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